문화풍습

문화풍습

한국의 장례풍습 - '상례와 제례'

상례는 죽은 사람을 처리하는 의례이며, 제례는 죽은 사람을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는 의례이다.

아득한 옛날에 죽은 사람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리하였는지 기록으로 전하는 것은 없으나, 무덤 형식만은 자세히 전한다.
옛 사람들이 쓴 무덤에는 고인돌과 독무덤,흙구덩이 무덤, 돌돌림무덤, 돌상자무덤, 돌각담무덤, 벽돌무덤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봉건시대에 들어와서는 흙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관을 넣은 다음 적절한 크리의 봉분을 만들고 그 위에 떼를 입히는 방법으로 무덤을 만들었다.

삼국시기에 죽은 사람의 수의는 따로 장만하였다. 그리고 가족성원들은 상제의 표식으로 흰옷을 입었는데, 부모가 죽었을 경우에는 대체로 3년동안 입었고, 형제의 경우에는 석달 혹은 장례기간만 상복을 입었다. 삼국시기만 하여도 상례와 제례에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격식이 특별히 없었다. 그런데, 고려 말기부터 봉건적인 주자가례가 강조되면서 상복을 입는 제도도 까다롭게 되고, 여러가지 복잡한 격식들이 생기게 되었다.

 

 (1) 상례에서 하는 첫 의식은 '습'이었다. '습'이란 죽은 이튿날 주검을 목욕시키고, 향을 뿌려준 다음 새옷을 갈아 입히는 것을 말한다.

 (2) 상계의 다음 의식은 주검을 베나 무명으로 싸고, 가로 세폭, 세로 한 폭으로 묶어서 관에 넣은 '염'이었다. 이것은 시체가 부풀어 올라 관이 터지는 것을 막으며, 후에 백골이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인 것처럼 말하여 왔으나, 사실은 번잡한 격식을 합리화하려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3) 입관할 때에 반함, 인정두기 라는 것을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미신적인 행위였다. '반함'은 저승길 양식이라고 하여 나무숟갈로 세 숟갈 쌀을 떠서 죽은 사람의 입안에 넣어주는 것이며, '인정두기'는 죽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몸에 걸친 옷의 동정이나 아무것을 떼어 관에 넣는 것이다. 어느때 부터인지 천이나 종이를 목에 둘렀다가 관에 넣어 주기도 하였다.

 (4) 입관한 다음에는 관 앞에 병품을 둘러쳐서 관이 보이지 않게 하고, 병풍앞에 상을 차려 놓았으며, '지방' (종이로 만든 신주)을 세우고 '명정'을 드리웠다. 그리고 향불을 피워 놓았다.

 (5) 입관할 때 다음 의식은 죽은 사람의 가족과 친척들이 일정한 격식에 따라 상복을 입는 '성복제'였다. 성복이란 상에 든 표식으로 상복을 입고 상제 차림을 하는 것이다.

조상은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의 뜻과 상제들에 대한 위로 및 방조의 뜻을 담고 있었다. 따라서 조상은 영구 앞에 이르러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과, 상제들에게 위로의 말을 하고 부조를 하며, 상제를 위하여 함께 밤을 밝혀주는 등의 일을 포괄하고 있었다.

조상온 사람들은 향을 피우고 술을 붓고 절을 하였다. 친척, 친우, 이웃들은 상사난 집에 쌀이나 돈 혹은 그 밖의 물건으로 부조를 하였다. 특히 동리에서는 팥죽을 쑤어다 주었다. 이것은 원래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슬픔에 잠겨 끼니를 끓여 먹지 않는 것을 걱정하여 이웃에서 음식을 가져다 준데서 생긴 풍습으로서 팥죽을 쑨 것은 '귀신'이 팥을 싫어한다는 미신적인 관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6) 상례에서 하는 기본의식은 '장례' 였다.

장례기일은 민중들의 경우에는 예로부터 오래 끈 적이 없었으며, 이조말에 보통 3~5일장이었다. 그러나 양반들은 짧아도 9일장, 길면 달을 넘기었다.

영구를 묘지까지 운반하는 것은 상여로 하였다. 봉건시기에는 마을마다 공동으로 '도가라는 것을 짓고 상여를 만들어 거기에 보관해 두었다가 상사가 나면 그것을 가져다가 이용하였다.

장례날에 상여에 관을 싣고 매장지에 나가 구덩이를 파서 묻고 봉분을 하였다.

이조시기에 장례의 연장으로 '면례'라는 것이 있었다. 면례란 한번쓴 무덤을 일정한 기간이 지난 다음 파내어 고쳐 묻는 것을 말하는 데, 이것을 천촌, 개장이라고도 하였다. 면례는 풍수설의 후과로서 보다 '좋은 곳'에 조상의 무덤을 옮겨씀으로써, 자손들이 '조상의 덕'을 보려는 미신에서 나온 행사였다.

 (7) 상례에서 하는 또다른 의식은 '흉제' 가 있다.

이조시기에 3년상이 일반화되었던 만큼 상례가 죽은 후 3년 (실제적으로는 27개월간 이다) 까지의 상복기간을 포괄하고 있었다. 이 상례기간에는 가무는 물론, 고기를 먹는것, 혼사를 하는것, 과거에 응시하는것 등을 금하고, 꺼리는 것이 많아서 생산과 사적 및 공적 생활에서 심한 구속을 받았다.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지내는 '초우제'로부터 시작해서 3일만에 지내는 '삼우제' 그리고 졸곡, 소산,대상, 담제 등 갖가지 제사는 상복을 입고 있는 동안 지낸다고 하여 '흉제'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이 인연관계가 있기 때문에 전혀 무시할 수는 없으나, 지나치게 많은 제사는 생활에 지장을 주는 폐풍이었다

(8) 제례에서 크게 이르는 것은 '기제'였다. 기제란 조상이나 그밖의 가족 성원들이 죽은 날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다른 제사들은 풍속으로 굳어져 있어서 하나의 행사처럼 지내는 것이었으나, 기제는 죽은 날에 지내는 것으로서 인연관계가 크게 작용하였다.

(9) 다음으로 제례에서 주요한 제사는 '시제 (사시제)'였다.

시제란 철을 따라 한해에 네번씩 절기의 중간달인 2,5,8,11월에 조상들을 동시에 제사지내는 것이었다.

(10) 제례에서 또한 주요한 것은 민간 명절에 지내는 '속절제'였다.

속절제는 보통 집에서 차례를 지내거나 무덤을 돌아보는 정도에 그쳤는데, 이조시기에는 정월 초하루, 한식, 단오, 추석의 4대 명절에 지내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한식이나 추석때 무덤에 가서 지내는 제사는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뜻도 있었지만, 무덤을 돌보는 뜻이 더 컸다. 그리하여 한식에는 겨울을 지낸 무덤을 손질하고 잔디를 입혔으며, 추석에는 여름동안 빗물에 씻긴 자리를 손질하고 자라난 풀을 베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상례와 제례는 복잡한 격식에 따라 미신적인 행사와 겹쳐서 진행되었다. ㄸ문에 봉건시기에 진행되던 상례와 제례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처리하며 추모하는 본질적인 뜻은 찾아보기 어렵고, 하나의 행사를 위한 행사로 되었다고 할 정도 였다.

 

위생처리 문화의 필요성 

위생 처리(Embalming) 란?

1) 위생 방부 처리
 위생처리는 우리나라의 장례문화-시신을 절대 손상하지 않는다는-와 많은 차이가 나는 일이지만 사회의 변화로 인해 위생 처리의 중요성이 점차 부각되고 있는 상태이다.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위생 처리는 혈관을 이용한 약물투입으로 이러한 위생 처리기술은 수백년동안 많은 병리학자, 미생물학자, 해부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연구된 결과로 인체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와 질병을 퇴치하기 위한 노력으로 현대적 의미의 위생처리기술이 개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가장 앞선 장례문화
 죽음을 바라보는 동양의 시각은 죽음 자체에 대해 논의를 금기시하고 무서운일, 보아서는 안되는 일종의 하나로 치부 하지만 서양에서의 죽음은 삶의 연장이며, 생활의 일부이며 죽음을 이야기하는것을 금기시 하지 않고 생활속에서 수용을 하는 사상 즉 죽음에 대한 거부나 부정이 아닌 적극적 사고방식의 문화이다. 따라서 죽음을 금기시하며 받아들이는 동양의 사고나 죽음을 생활속에서 수용하고 삶의 연장으로 받아들이는 양자의 문화에는 많은 차이가 있으며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근본적으로 하는 서양인들의 장례문화의 실용성과 현실성은 공중보건의 입장으로만 보았을 때 가장 앞선 장례문화를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위생 처리는 장례문화의 길잡이
 이집트의 자연을 이용한 방부처리부터 현재의 과학과 의학을 이용한 위생처리의 궁극적 목적은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함이며 비록 출발은 신앙적 믿음에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공중보건을 예방하고 질병의 확산을 막아주는 장례문화에 있어서 길잡이가 됨.

 [위생처리의 필요성]

대중교통수단의 발달로 세계의 일일생활권이 형성되었고 우리나라의 고도의 경제 성장과 유구한 문화유산을 보고자 많은 외국인이 빈번하게 국내로 출입하고 있으며 많은 한국인들이 해외 각지에서 한국인의 자긍심을 높이고 있으며 해외 여행은 이제 일반적인 생활의 일부분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교통수단의 대형화로 인해 비행기 추락이나 여객선의 침몰 등의 사고시 많은 인원의 내,외국인이 국내외에서 사망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또한 대량으로 시신이 발생시 공중보건상 많은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으며 각종 전염병 유발 등 국민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국제법상 시신의 국내,외 입출국은 위생 처리를 해야만 허용되며 본국으로 이송될 수 있도록 정해져 있다. 이것은 시신의 부패로 인한 여려 병원균과 질병의 대중교통수단 파급을 막으려는 세계의 공중보건에 대한 인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위생처리를 전문적 위생 처리사만이 할 수 있도록 정해져 있으나 현재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전문적 위생처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문가라고 입증할 수 있는 자격증 또한 전무한 실정이다. 이로 인해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집단 사망자 발생시 효율적 관리의 부재) 이나 괌 KAL기 사건 (우리나라의 전문적 위생처리사가 없어 시신의 이송이 늦어짐) 등을 통해 국가적 망신을 당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전문 장례지도사 육성을 통한 대책 마련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하겠다. 또한 현대인들의 공중보건에 대한 인식이 정립되고 있는 만큼 많은 이들이 시신의 위생처리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으며 시신에서 나오는 수많은 병원균을 생각하고 현재의 장례문화를 볼 때 위생처리사 뿐만 아니라 시신의 가족들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서도 이를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즉, 시신관리를 효과적이고 위생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뒷받침하여 장례식장의 전문성을 높여야 하며 교육을 통한 전문가 양성과 함께 장례문화의 선진국화를 위해 전문가가 시신을 만지고 위생적 관리를 하는 것을 법제화해야만 국민들의 댜양한 욕구에 부응할 수 있으며, 건전한 장묘 문화가 하루속히 정착될 것이라고 판단된다.
- 현재의 장례문화는 인구 고령화, 핵가족화 및 거중공간의 변화로 인해 급속한 변화과정을 겪고 있는데,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어 장례상담, 시신관리 의례지도, 장례행정 관리 등을 포함한 장례서비스도 종합적이고 전문적인 서비스를 요구하고 있는 추세이다. 따라서 시신의 위생적 관리를 포함한 장례서비스를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수행 할 수 있는 전문 장례지도사의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것은 모든 것이 전문화, 특수화되어 발전해가고 있는 현 사회의 욕구에도 부합되는 것이며 현재 통일되지 않은 장례문화에 의해 불필요한 국가적 낭비를 막기위한 국가정책의 올바른 시행과 유도차원에서도 장례전문인의 양성은 절실히 필요하며 선진국으로 발돋음하기 위한 중요한 초석이 될 것이다. 공중보건을 예방하고 감염경로를 차단하기 위해 방부처리를 하려면 인체에 연관되는 많은 지식이 있어야 한다. 즉 우리 인체의 각 기관과 기능 및 위치를 정확히 공부해야 한다. 돌아가시는 모습의 형태와 원인이 다양하듯 경험있는 방부처리사는 사체를 대하는 순간 이러한 모든 종합적인 요소를 판단하여 어떠한 약품을 쓰고, 어떠한 방법으로 방부를 해야 하는지 종합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위생처리의 일반적인 방법]

사체의 정지된 혈관을 이용해 약품을 주입하는 것. 돌아가신 분은 혈액 순환이 정지되어 있기 때문에 적당한 압력을 지속적으로 주어야 정지된 혈액을 다시 순환시킬 수 있으며 혈관의 탄력이 어느정도인지 판단해야 한다. 일단 동맥을 통해 주입된 약품이 인체 밖으로 배출되어져야 하기 때문에 주입된 적당량의 약품이 인체에 잔류하고 필요없는 약품이 인체 밖으로 배출되어져야 하기때문에 방부처리가 되어지면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상황을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되풀이 하면서 인체의 여러곳을 사용해 반복처리하면 시체는 서서히 방부되어집니다. 더욱 정교한 방부처리는 여우처리도 가능하게 만든다. 주로 동맥을 이용한 방법이 가장 근본이 되며 장례를 치르는 동안 충분한 위생처리가 된다. 일단 인체내에 침투된 약은 피부조직에 스며들면서 살균을 하며 인체내에 있는 습기를 서서히 제거해 준다. 즉 시체내에 있던 세균의 배양조건을 일시적으로 살균하는 역할을 하므로 시체의 부패속도를 잠시 정지시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것입니다. 이후 장례식이 끝나고 매장을 하게 되면 땅속의 습기와 배양조건에 시체는 원래의 부패속도를 유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게 된다.

 [위생처리의 유용성]

인체내에 투여된 약품은 인체내에 있던 단백질과 합성이 되어 근육의 경직현상이 가속화. 이때 약품의 농도에 따라 경직현상의 강도가 결정되고, 혈관이 얼마나 빨리 손상되는가가 결졍. 사체의 경직현상이 이루어질때 제한된 시간에 고인의 얼굴모습, 입이나 손, 기타 필요한 부분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복원할 수 있다. 한번 경직된 사체는 복원이 불가능하므로 방부처리가 되어지는 이때 주위깊게 작업을 임하여야 한다. 일차적인 방부처리 즉 동맥을 이용한 사체에 대한 위생처리 즉 방부처리가 완료된 이후에는 상황에 따라 이차적 방부처리가 필요하다. 즉 혈액의 순환이 적은 인체내의 각 기관과 다른 조직에 약품을 투여. 길고 커다란 주사기를 사용하여 약품을 주입하는데 사체의 상황이나 여러가지 정황을 참작하여 약의 농도, 투입하여야 할 위치를 정한다. 사체를 외국이나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할 경우, 무더운 여름, 사체의 보관기간등을 고려하고 장례기간이 길어지게 되는 경우도 참작을 하여야 한다.

 

 화장이란

*매장의 폐해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매장 위주의 장묘문화는 개인은 물론 사회전체에도 커다란 경제적 부담이 됩니다. 거주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사후관리가 어렵고 자연재해로 유실될 위험도 있습니다.
매장을 하기 위해서는 수의와 관 등 값비싼 장의용품을 구입해야 하고 묘지도 구입해야 하며 기타 많은 비용이 듭니다. 묘지를 꾸미는 데 과다한 비용을 들이는 허례허식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년 중 한식이나 추석과 같은 일정시기에 성묘 행렬이 집중 되어 교통체증을 유발함으로써 개인적인 비용은 물론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고 있습 니다.
매장을 하고 나면 사후관리에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묘지는 일반적으로 주거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조상을 잘 섬기기 위해 지켜져 온 매장중심 장묘제도가 오히려 성묘를 꺼리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수해와 같은 자연재해 로 묘지가 대량 유실되는 등 피해가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화장은 우리의 전통적인 장묘제도이며 많은 장점이 있습니다

@ 화장은 우리의 전통 장묘제도
 화장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우리의 전통 장묘제도이며 선진 외국에서도 화장은 이미 보편적인 관습입니다. 화장을 하는 것은 결코 전통 관습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며 세계 장묘 문화의 큰 흐름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 청결하고 평화롭게 모시는 장법(葬法)
조상을 멀리 떨어진 산에 모셔 거친 자연환경과 천재지변 속에 두고두고 고통받게 하는 것보다 화장을 하여 납골을 하면 언제나 깨끗하고 평화롭게 모실 수 있습니다.

 @ 조상과 후손, 가족간의 유대 강화
 화장을 하여 가족납골묘나 추모의 집 등 가까운 납골시설에 조상을 모시면 문중이 자주 한자리에 모여 가족유대를 강화할 수 있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또 대대로 가족의 묘소를 한 곳에서 관리할 수 있어 매우 편리합니다.

 @ 저렴한 비용, 편리하고 위생적인 관리
 화장은 우선 장례비용이 저렴합니다. 수의나 관 등 장의용품에서 비용을 줄일 수 있고 조문객 접대비, 차량이동비만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어 유가족의 장례비용 부담이 훨씬 덜합니다. 납골시설을 이용하면 묘지비용을 전액 절감할 수도 있습니다.

 

 전통제례와 현대식 제례

◈전통제례

 아마도 우리나라가 다른 나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끔찍이도 조상을 모신다는거였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스스로 죄인이라 생각하였고. 무려 3년동안이나 보모님께 상식을 올리는것도 흔히볼 수 있었다. 제례는 본디 조상에 대한 숭앙심(崇仰心)과 추모(追慕)에 뜻이 있으니, 건전한 조상의 혈통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 하였다.

제사의 근원은 먼 옛날에 천재지변(天災地變), 질병(疾病), 맹수(猛獸)의 공격을 막기 위한 수단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근세에 와서는 유고사상으로 조상에 대한 존경과 애모의 표시로 변하게 되어 가장마다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봉사대상은 시대에 따라 변천되어 왔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공민왕 이년에 포은 정몽주 선생이 제정한 제례규정에는 대부 이상의 관원은 삼대 봉사(三代奉祀)로 하고 육품이하의 신문을 가진 사람은 이대봉사이고 칠품이하의 하급관원과 서민들은 부모제사만 지내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후 조선시대 경국대전 예전편에 기록된 제례의 봉사대상을 보면 사대부이상은 사대봉사, 육품이상은 삼대봉사, 칠품이하는 이대봉사 일반서인(一般庶人)은 부모제사만 지내도록 되어 있었다.

 

◈현대식제례

 오늘날 제사도 유교에 입각한 제례의식에서 벗어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옛날에는 제사가 형식에 치우쳐 낭비적인 요소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정성과 격식을 갖춘 아주 예의 바른 하나의 의식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발달과 핵가족 중심으로 인해 많은 자손들이 대부분 흩어져 살 수밖에 없게 된 오늘날 새로운 각도에서 제사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사란 한마디로 말한다면 자신의 뿌리와 근본을 알고 나를 있게 해준 조상들에게 감사하고 공경과 효심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미신적이고 형식적인 차원을 떠나 바라보아야 하며, 자신의 근본을 망각하고 특정 종교로 인해 제사를 생략한다거나 소흘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스스로가 인륜을 저 버리는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비록 지나친 형식과 절차를 떠나 현대에 맞는 의식 절차로 제사를 지내도 별 무리는 없다고 본다면 제사란 효의 근본 행위인 것이다.

현대 도시 사람들이 행하는 제사는 정부가 1969년 가정의례준칙 및 가정의례법을 제정하여 虛禮虛飾(허례허식)을 피하고 검소한 제례를 갖추도록 권장해 온 이후, 기제의 대상이 부모, 조부모 및 배우자로 국한되는 경향이 많아 졌다. 1999년 8월 31일 '가정의례준칙'은 폐지하고 동일자로 '건전가정의례준칙'을 공포하였다. '가정의례준칙'은 규제중심 이였다면 '건전가정의례준칙'은 자율적인 정착에 역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수의란

수의: 염습(殮襲)할 때 시체에 입히는 옷.
세제지구(歲製之具)라고도 한다. 유교에 따른 의식을 치르기 전, 한국의 옛 수의가 어떠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사람이 죽어서 입는 옷이니 만큼 당시의 성장(盛裝)으로써 수의를 삼았을 것으로 추측된다.수의는 주로 윤달에 마련하는데, 하루에 완성하여야 하고 완성된 것은 좀이 쏠지 않게 담뱃잎이나박하잎을 옷 사이에 두어 보관하며, 칠월 칠석에 거풍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관(冠)혼(婚)상(喪)제(祭)의 사례(四禮)를 유교, 특히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준하여 거행하였다.
수의는 《사례편람(四禮便覽)》 상례조(喪禮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남자는 복건(幅巾)망건(網巾)심의(深衣) 또는 단령(團領)답(荏:소매 없는 莎衣) 또는 직령(直領)대(帶:條帶)과두(벱頭:배와 허리를 싸는 것), 포오(袍虜:中赤莫)와 같은 설의[褻衣], 한삼(汗衫:몸에 다는 小衫, 속칭 적삼)고(袴)단고(單袴:속바지)소대(小帶:허리띠)늑백(勒帛:속칭행전)말(襪)구(뻔)엄(掩:벱首)충이(充耳)멱목(콸目:覆面)악수(握手:벱手)를 갖추었다
 여자의 경우는, 사(哥)심의 또는 단의(씔衣) 또는 원삼(圓衫)장오자(長虜子:속칭 長衣)대삼자(衫子:속칭 唐衣)포오(속칭 저고리)소삼(小衫:적삼)과두(벱원:속칭 요대)상(裳)고단고말채혜(彩鞋)엄충이명목악수 등이다. 위의 수의는 관습화하여 오늘날에도 특수한 종교의식에 의한 염습 외에는 이를 따르며, 후박(厚薄)이 있을 뿐이다윤달수의윤달은 일반적으로 전통 태음력(太陰曆)에서 19년 동안 7번의 윤달을 넣어 책력(冊曆)과 계절(季節)을 일치시켰는데, 명칭은 윤월(閏月), 윤삭(閏朔), 윤여(閏餘) 등으로 불린다.윤달은 일년 중 한달이 가외로 더 있는 달이기에 모든 일에 부정(不淨)을 타거나 액(厄)이 끼이지 않는달로 인식되어 왔다. 그래서 주로 집안의 수리나 이사(移徙)를 하기도 하고, 특히 혼례(婚禮)를 올리는 날로 잡거나 집안 어른의 수의(壽衣)를 만들어 놓으면 좋다 하여 윤달에 많이 거행한다.

우리 민족문화의 근간은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고 그중 으뜸은 상례문화(喪禮文化)라 할 수 있으며 이 상례문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인과 영생을 함께할 수의입니다. 즉, 수의는 자식이 고인에게 드리는 마지막 예와 효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수의에 대하여 정확한 연구자료는 없지만 935년 신라의 마지막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를 빼앗긴 설움에 당시 서민들이 즐겨입던 누런 삼베의 누더기 옷을 입은 채 개골산 (皆骨山 - 지금의 금강산) 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자이에 우리의 조상들은 상(喪)을 당했을 때 삼베옷을 입고 망자(亡者)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하는 상복(喪服)의 풍습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러한 삼베수의 문화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유는 단지 우리의 전통적인관습에 있기보다는 삼베가 갖고 있는 놀라운 여러 가지의 기능을 이미 우리의 조상들은 알고 계셨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즉, 삼베(大麻)는 다른 직물은 물론 같은 마직물인 아마(亞麻)나 모시(苧麻)보다도 매우 뛰어난 수분 흡수력과 배출력, 항균(抗菌)기능과 항독(抗毒) 그리고 살속까지 파고든다는 자외선 차단기능을 갖추고 있는 직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수의를 삼베로하게되면 조상의 시신으로부터 잡균의 서식을 막아주어 시신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모실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또한, 풍수지리설에따라 좋은 명당에 묘를 쓰듯이 삼베로된 수의의 사용은 이러한 삼베의 특성 때문에 시신이 잘 유기되어고인의 유골이 변색되지 않고
 황골(黃骨)이되어 동기감응(同氣感應)식으로 조상의 기가 후손에 전해짐으로서 후손들에게 번영과평안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것이라 합니다. 한편 오늘날까지도 부모님의 묘자리와 영정 그리고 수의는 살아생전에 미리 준비해두는 풍습이 전해져오고 있는데 그중 수의는윤년(閏年) 윤달(閏月)에 준비하거나 또는 부모님의 육순/칠순때 준비해드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금년과 같이3-4년마다 반복되는 윤년(閏年) 윤달에 살아계신 부모님에게 미리 수의를 준비해 두곤 하였는데 이는 윤달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되는 공(空)달이기 때문에 그 달에는 무엇을 하든지 아무런 탈이 없는 달이라하여 이시기에 준비해드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편 이렇게 살아생전에 부모님의 수의를 준비해 드리는 것은 최근에 일부자손들이 마치 부모님의 죽음을
 기다리는듯한 불효(不孝)의 의미로 받아드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경우이며 오히려 이러한 수의의 준비를 부모님께서는대단히 큰 선물로 생각하고 계시는데 그이유는 살아생전에 수의를 준비하는 것은 부모님을 더욱 건강하고 장수하심을 기리는것이며 자손은 번영과 평안을 받게 된다는 믿음이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진수의란?- 격식을 갖춘수의라는 뜻으로 수의복을 포함한 부속류 일체를 말합니다.

평수의란?- 가진수의에서 장매 천금(이불)과, 지금(요), 도포(남)또는원삼(여)이 제외된 수의로서 옛날 평민이하 하류계층의 사람들이 이용하던 수의이며. 근래에는 행려자등에게 사용합니다.

세(細)란?- 올의 가늘고 굵음을 뜻하며 1세는 80가닥의 올을 말합니다.
수의가 큰 이유는? - 수의는 일반의류에 비해 매우크게 만드는데 그 이유는고인(故人)에게 수의를 입힐 때 고인을 과도하게 움직이지 않도록하기 위함인며, 이는 고인을 과도하게 움직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진수의를 만들기위한 삼베의 양- 남자용과 여자용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 195자(폭34-37cm)정도가 소요 됩니다.

 

제사의 의의

제사의 의의(意義)

상례(喪禮)는 사람이 죽었을 때 장사를 지내는 의식절차를 말하며 제례(祭禮)는 돌아가신 분에 대한 제사(祭祀)를 지내는 여러가지 의식절차 예절을 말한다.
따라서 제사는 돌아가신 조상에 대한 애정과 추모, 그리고 조상님에 대한 넓고 깊은 은혜를 후손들이 높이 새기며 기리는 의식으로 신명(神明)을 받들어서 복(福)을 비는 후손들의 성의 표시인 것이다.

이 제사의식은 조상숭배사상이 보편화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중국 유학(儒學)의 영향으로 "인간은 조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그 사상에 뿌리를 둔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천(天),월(月),성(星)과 풍사(風師),우사(雨師),사직(社稷), 산악(山岳), 강천(江川), 또한 선왕(先王), 선사(先師), 선조(先祖) 등을 대상으로 제사(祭祀)를 지내왔다.

그렇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과학문명의 발달과 미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전통의식 구조변화, 사람의 의식성향 향상 등으로 위 대부분의 제사 대상이 그 의미를 이미 잃게 되었으며 금일에 와서는 거의 선조에 대한 제례의식으로 전환되었다.

이처럼 수천년 동안이나 지켜 내려온 제사는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 사람의 근본을 알아가는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임에도 불구하고 점차 핵가족 등과 종교의 영향 등으로 그 의미가 조금씩 엷어져가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하지만 아직까지 추석명절 등에 고향으로 내려가는 수많은 귀향차량 행렬을 보면 우리국민의 대다수가 조상님에 대한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찾아가는 걸로 보아 아직까지는 이 우리문화가 후손에게 잘 전수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이기에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제사의 유래

제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원시적 미개사회에서부터 출발하여 지금까지 수천년간 지속되어온 의식이다.

우리나라는 고려말엽에 성리학(性理學)이 주자가례(朱子家禮)와 함께 수입되면서 제사를 지내는 조상숭배사상이 보편화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성리학을 치국이념(治國理念)의 근간으로 삼아 더욱 증대되었다.

이는 성리학의 내용중에 예(禮)를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보았기때문에 기인 한 것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주자가례] 예법에 사대부 사이에 조상숭배운동이 더욱 확산되어 화려한 제사문화가 꽃피었던 시기다.

이후 유교(儒敎)문화가 널리 보급되면서 전통사회시대의 엄격한 제례법이 정형화되어 갔으며 이를 토대로 제례는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